스마트폰 배터리가 빨리 닳거나, 가전제품이 고장 나면 소비자는 수리보다 새 제품 구입을 택하기 쉽다. 수리 비용이 부담스럽고 부품을 구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선택의 배경에는 기업의 신제품 판매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기업은 노후제품 수리 지원을 강화하는 것 보다 기업의 역량을 모아 발표하는 새로운 제품 판매를 우선시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소비자가 수리를 원하더라도 비용과 접근성의 장벽에 부딪히면 새 제품을 선택하게 된다.

수리 대신 새 제품을 구매하는 일이 반복되면 제품의 수명은 짧아지고 전자폐기물 발생량은 증가한다. 국제전기통신연합(International Telecommunication Union, ITU)과 유엔훈련조사연구소(United Nations Institute for Training and Research, UNITAR)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전자폐기물 발생량은 약 6,200만 톤으로 2010년보다 82% 증가했으며, 수거 및 재활용된 양은 전체의 22.3%에 그쳤다.
이런 문제의 대안으로 주목받는 개념이 바로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다. 소비자가 제품을 직접 수리하거나 원하는 업체를 통해 수리할 수 있도록 부품과 수리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수리할 권리는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혀 제품의 수명을 연장해 전자폐기물 감축과 자원순환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수리할 권리의 제도화
수리할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움직임은 유럽연합(EU)의 2024년 ‘수리 촉진 지침’ 채택으로 구체화됐다. 이 제도는 수리를 원하더라도 여러 문제에 부딪혀 새 제품을 선택해야 했던 소비자들이 수리를 실질적인 대안으로 삼을 수 있도록 독려한다. EU는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제품에 대해 제조사가 수리를 지원하도록 하고, 소비자가 수리 비용과 서비스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제도화했다. 제조사가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수리를 부당하게 어렵게 만드는 행위도 제한해 소비자가 제품을 더 오래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올해 7월 31일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이 지침에 따라 소비자는 법적 보증기간 내 제품에 결함이 발생했을 때 수리와 교환 중 구제 방식을 선택할 수 있으며, 수리를 선택하면 판매자의 법적 책임 기간이 12개월 연장된다. 보증기간이 끝난 뒤에도 지침이 정한 제품은 일정 요건에 따라 제조사에 수리를 요청할 수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 지침으로 인한 성장과 투자 효과를 48억 유로로 추산했다.
한국의 수리할 권리, 어디까지 왔나
한국도 가전제품 수리와 관련한 소비자 보호 기준을 운영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냉장고와 TV의 부품 보유기간을 9년, 세탁기를 7년, 에어컨을 8년으로 정하고 있으며, 부품이 없어 수리가 불가능한 경우 등에 대한 보상 기준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보상 기준은 EU와는 제도적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다. EU는 수리 촉진 지침을 통해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제품에 대해 제조사가 보증기간 이후에도 수리를 제공하도록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는 소비자가 제품에 문제가 생겼을 때 새 제품을 구매하는 대신 수리를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반면 한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을 통해 부품 보유기간과 수리 불가 시 보상 등 분쟁 해결을 위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소비자 피해에 대응하는 기준은 마련돼 있지만, 소비자가 수리를 실질적인 선택지로 삼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한국은 예비부품 확보와 배송 기한 등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만, 제조, 수입업자가 관련 기준을 준수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EU에 비해 제조사의 수리 의무를 실질적으로 강제하는 제도적 기반이 부족하다.
고쳐 쓸 수 있는 사회를 향해

수리할 권리의 핵심은 소비자에게 무조건 제품을 오래 사용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 제품 구매와 수리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 아무리 수리할 의사가 있어도 부품을 구할 수 없거나 비용이 지나치게 높다면 소비자의 선택지는 사실상 새 제품 구매로 좁혀진다. 결국 수리할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란 고장 난 제품을 버리는 것만큼 고쳐 쓰는 일도 어렵지 않은 사회다.
by Editor 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