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기업의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을 대폭 간소화한다. 공시해야 할 전체 데이터 항목을 70% 넘게 줄여, 기업의 보고 부담을 낮추는 것이 핵심이다.
이번에 손질한 것은 유럽지속가능성보고기준(European Sustainability Reporting Standards, 이하 ESRS)이다. ESRS는 기업이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노동, 인권, 기업지배구조 등 지속가능성 정보를 어떤 기준에 따라 공개해야 하는지 정한 규칙으로, 개정 기준은 2026년 11월 10일 발효된다. 의무 적용은 2027년 1월 1일 이후 시작하는 회계연도부터다. 이번 개정은 EU가 추진해 온 기업 규제 간소화 정책의 하나로, 공시 정보의 비교 가능성은 유지하면서 기업이 자료를 모으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기존 ESRS의 공시 부담
ESRS는 EU의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orporate Sustainability Reporting Directive, CSRD)에 따라 마련된 공시 기준이다. CSRD가 어떤 기업에 지속가능성 보고 의무를 부과하는지 정한다면, ESRS는 해당 기업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기존 ESRS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자원 사용 등 환경 분야뿐 아니라 근로자, 공급망 노동자, 소비자, 기업 윤리까지 폭넓게 다뤘다. 기업은 이러한 주제가 사업에 미치는 영향과 기업 활동이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고, 중요한 정보를 공시해야 했다.

문제는 공시 준비 과정에서 기업이 수집하고 검토해야 하는 정보가 많고, 일부 요구사항이 복잡하거나 중복된다는 점이었다. 특히 기업 내부에 없는 공급망 정보를 확보하거나, 중요성이 낮은 항목까지 공시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부담이 발생했다. 이에 EU 집행위원회는 기업 경쟁력 강화와 행정 부담 완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ESRS 개정을 추진했다. 지속가능성 정보를 공개한다는 기본 목적은 유지하되, 기업이 실제로 중요한 정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준을 조정하는 방향이다.
공시 데이터 항목 70% 이상 축소
이번 개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공시 데이터 항목의 감소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개정 ESRS는 기존 기준과 비교해 전체 데이터 항목을 70% 넘게 줄였으며, 의무 데이터 항목도 60% 이상 축소했다. 두 수치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전체 데이터 항목에는 의무 항목뿐 아니라 조건에 따라 보고하는 항목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전체 항목이 70% 이상 감소했다는 사실이 모든 기업의 의무 공시가 같은 비율로 줄어든다는 의미는 아니다.

공시의 출발점인 이중 중요성 평가(Double Materiality Assessment, DMA)도 간소화 대상이다. 이중 중요성 평가는 기업 활동이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기후변화나 환경 규제 등이 기업의 경영과 재무에 미치는 영향까지 양쪽에서 살펴보는 절차다. 개정 기준은 이러한 평가의 기본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기업이 중요성을 판단하고 관련 정보를 공시하는 절차를 간소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공급망 정보 수집과 관련한 부담도 완화한다. 기업이 직접 관리하지 않는 협력사나 거래처의 데이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고려해 공시 요구사항과 적용 방식을 조정한 것이다. EU 집행위원회는 간소화에 따라 기업당 공시 비용이 30% 넘게 절감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이는 개정 기준의 예상 효과로, 실제 절감 규모는 기업의 사업 구조와 기존 공시 준비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한국 기업에 미치는 영향
ESRS 간소화는 유럽 기업만의 변화는 아니다. EU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나 유럽 기업과 거래하는 국내 협력사도 개정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만 모든 한국 기업에 ESRS가 직접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EU에서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를 부담하는 기업은 개정된 기준에 따라 보고 체계를 조정할 수 있다. 기존에 수집하던 데이터 가운데 삭제되거나 간소화된 항목을 확인하고, 새 기준에 맞춰 공시 절차를 정비할 수 있다는 의미다. EU 기업에 제품이나 부품을 공급하는 국내 협력사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기존에는 협력사가 직접 공시 의무를 부담하지 않더라도 거래 기업으로부터 온실가스 배출량이나 노동 관련 정보를 요청받을 수 있었다. EU는 이러한 간접적인 정보 제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소규모 기업을 위한 자발적 지속가능성 보고 기준도 마련했다.

특히 EU 집행위원회가 발표한 기준에는 공시 의무 기업이 공급망 내 기업에 요청할 수 있는 지속가능성 정보의 범위를 제한하는 장치가 포함됐다. 다만 개별 거래 관계에서 어떤 정보 요청이 허용되는지는 적용 대상과 관련 규정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은 공시 기준의 간소화와 공시 의무 대상의 축소다. ESRS 개정은 기업이 보고할 정보와 작성 방식을 조정하는 것이고, 별도로 추진된 EU의 옴니버스 개정은 CSRD에 따라 보고해야 하는 기업의 범위를 줄이는 조치다. 두 변화는 연결돼 있지만 같은 제도는 아니다.
공시 부담은 줄이고 정보의 품질은 유지
ESRS 간소화는 유럽의 지속가능성 공시 정책이 정보의 양뿐 아니라 활용 가능성과 작성 부담도 고려하는 방향으로 조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시 항목이 많다고 반드시 더 유용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수많은 항목을 채우는 데 집중하면 정작 투자자와 이해관계자가 판단에 활용할 중요한 정보가 방대한 보고서에 묻힐 수 있다. 반대로 공시 항목이 지나치게 줄어들면 기업 간 비교에 필요한 정보가 부족해질 가능성도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번 개정을 통해 기업의 행정 부담을 줄이면서도 투자자와 이해관계자에게 필요한 지속가능성 정보의 품질을 유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따라서 이번 개정은 기업의 환경 및 사회적 책임을 없애는 조치라기보다, 그 책임을 어떤 정보로 설명하고 공개할 것인지에 관한 기준을 조정하는 변화로 볼 수 있다. 공시 항목이 줄어든 만큼, 개정된 ESRS가 실제로 중요한 정보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지가 새로운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
